문득 어릴 때 다니던 단골 동네 이발소가 생각난다. 고만한 나이의 또래들이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찾던 별로 유쾌하지 못했던 이발소에 대한 단상너머로 빛바랜 액자 하나가 또렷이 걸려 있다. 길쭉한 거울에 웃통을 벗은 개구쟁이 꼬마의 얼굴이 흥미롭고 흰 가운을 입은 이발사의 현란한 손동작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도 잠시뿐 까칠한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괴롭히고 지루함에 이리저리 몸을 떨 때 유난히도 눈에 띄던 예의 그 액자속의 글이다.
“삶”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이 시는 내 어린 날 이발소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수없이 읊었던 짤막한 노래였던 것이다.
철이 들고 집짓기를 업 삼은 이즈음 삶의 그릇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노라면 이 자유의 노래가 썰물처럼 밀려와 하얀 백지를 온통 먹빛으로 물들게 한다.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다.”
행복이 깃든 집을 지을 요량으로 화두삼아 놓지 않는 말머리인 “집이 뭣고!”라는 이 방면의 공부는 참으로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내 삶도 아닌 네 삶을 담는 그릇이 더욱 어렵고 난감한 게다. 지금까지 책보고 사색하고 더러 지어본 경험을 빌려 많은 사람들에게 앵무새처럼 집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를 해왔지만 진지하게 자신의 삶의 그릇을 통찰해 보지 않은 자에겐 그것이 결국은 다 공허한 메아리임을 잘 안다.
집이 별건가요? 가족이 불편 없이 살고 생활에 지장이 없으면 되지요. 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이에게도 늘 동경하고 꿈이 가득한 이상적인 집이 자리하고 있음은 가히 놀랍다.
대저 집짓기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의 즉답이다. 집은 주인을 빼 닮는다.
집에는 가족의 표정이 역력해야한다.
그래야 살아있는 집이다.
삶의 가치가 묻어나고 사는 이의 생각이 녹아있고 올곧은 정신이 깃들 때 집은 편하고 유순해진다.
내가 살집이 눈에 차온다.
야트막한 동산에 기댄 정겨운 질그릇처럼 동네 전설을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박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담 너머에는 왼 종일 따뜻한 볕이 꾸벅 꾸벅 졸고 있고, 개울물 졸졸 하염없이 흐르는 내천에는 가슴 후련한 빨래터가 있었으면 좋겠다.
돌담의 질경이처럼 동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때론 삶의 설운 자락을 하염없이 보듬는 이웃이 되었으면 좋겠다.
베푸는 삶은 집의 뼈대요, 성찰하는 삶은 집의 혈관이며, 풍요롭고 윤택한 삶은 집의 살이다.
행복이 가득한 집, 온전한 집을 짓는 것은 삶을 경영하는 것이다.
행복이 가득한 집 / 목눌(木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