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결이 출렁이는 가을 들녘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대자연의 웅혼한 모습을 보고 장승처럼 망연히 멈추어섰다. 대지는 노을 빛으로 짙게 번져가고 저만치 산이 붉게 꺼져 가는 모습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가슴 벅찬 희열 그 자체였다. 무작정 뛰었다. 뇌리를 스치는 역마살은 한달음에 하숙집으로 달려가 배낭을 꾸려 야간 열차에 몸을 싣게 하는 마력을 뿜고 있었다. 철없는 열정이었을까? 전공 강의를 빼먹는 부담은 점점 익숙해지고 대학 생활 내내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는 어쩔 수 없는 개똥 철학을 붙들고 옷매무새 고쳐 산 우러러 합장하며 쉬엄없이 바람같이 노루새끼마냥 많이도 쏘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행동에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그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고 가슴 뛰노는 산행의 즐거움에 멋진 인생을 향유하던 내 젊은 날의 초상화다.
사회 생활의 무료함이 묻어나면서 온 몸으로 만끽하던 산행을 어느 결에 놓고 말았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실리를 찾은 셈이다. 산 대신 한옥 찾아 떠나는 횟수가 잦아진 탓이다. 집 따라 방방곡곡을 누비며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이 또한 가슴 살찌우고 눈 맛 매섭게 하는 공부거리였다.
하지만 이 모두가 직업과 유관하여 사실 떠남에 대한 야릇한 기대나 흥미진진한 감흥은 예전 같지 않았다. 눈과 귀를 돌렸다. 은사님께서 서양 건축의 역사 체험 기회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어느덧 수년째 선생님을 모시고 연구실 선후배가 함께 연례 행사로 답사 여행을 즐기고 있다. 보름 가까운 일정으로 낯선 세계를 누비며 보고, 듣고, 느끼며 서로의 건축관을 다듬어 왔다. 한옥과 동떨어진 세계이지만 분명 한옥이 거기에도 있었다. 천의 얼굴이 이러할까? 참으로 잘난 모습으로 우쭐거리며 뽐내다가 때론 풀 죽은 표정으로 뒷전을 서성거린다. 우열을 논할 잣대는 이미 가치가 없어진 지 오래다. 다만 한옥 사랑의 의미만 새로이 더할 뿐이다. 넓은 세상과의 만남은 내 삶 속에 또 하나의 내밀한 공간을 주었다. 스승의 고마운 배려가 감동으로 와 닿는다. 깊어가는 선후배의 정은 덤으로 여겨지는 즐거움이다. 나는 오늘도 훠이훠이 팔자걸음 걸으며 오롯한 산길을 찾는다. 인생의 여정을 콧노래질하며 한량 없는 즐거움으로 어짊과 지혜를 가꾸고 손질해 본다.
여행의 즐거움 / 목눌(木訥)
